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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산 1
  • 마이산 2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남쪽 약 3㎞ 지점에 있는 두 암봉(바위)으로 된 산.

높이는 서봉(암 마이산) 685m, 동봉(수 마이산) 678m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경계에 있으며, 동봉과 서봉의 모양이 말(馬의) 귀(耳)처럼 생겼다 하여 마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질은 백악기의 역암(礫岩)이다.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시작되고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렸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448개의 층계가 있고, 동봉 중턱의
화암굴에서는 약수가 솟는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인 탓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활엽수가 자란다. 4월에는 공원 입구에서 3㎞에 걸쳐 벚꽃이 만발해 진안군에서 주최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

동봉(수 마이산)은 오를 수 없다.

또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마이산탑(전북기념물 35), 마이산 줄사철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380)를 비롯하여 은수사(銀水寺)· 금당사(金塘寺) 등의 고찰이 있다. 금당사에는 괘불탱(掛佛幀:보물 1266), 목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18), 석탑(전북문화재자료 122) 등의 문화재가 있다. 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 형세 독특
마이산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돋운 건 바로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사이에 세워진 수많은 돌탑들이다. 두 암봉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가면 우람한 암봉과 돌탑들이 탑사(塔寺)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껏 감돈다. 이 돌탑을 쌓은 이는 이갑룡(李甲龍 1860∼1957) 처사.
10여년간 명산대천을 떠돌며 수양을 쌓던 그는 1900년대 들어 마이산에 정착한 후 돌을 쌓기 시작해 30여년 만에 완성했다. 이 돌탑은 태풍이 불 때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돌탑의 숫자는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80여개만 남아있다.
돌탑은, 그곳에 한번 들어서면 빠져 나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교한 석진(石陳)인 제갈량의 팔진도법(八陳圖法)에 따라 배치했다고 한다. 숫마이봉은 당당한 남성처럼 곧추선
바위봉이라 등산로가 없고, 암마이봉에만 등산로가 나있다. 남부주차장∼탑사∼암마이봉∼탑사 코스는 2시간쯤이면 다녀올 수 있어 인기가 있다.
전 설
마이산에 얽힌 전설이 2가지가 있습니다.

마이산이 된 산신 부부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자시 11시~01시)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한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는 두 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빗한 모양이 말의 귀와 같구나.
높이는 몇천길이 되는 데
연기와 안개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에도 또한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가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교묘함은 실로 끝이 없으니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일을 생각하도다.
- 김종직(성종 때의 성리학자)

옛 시인의 노래에 등장한 임금은 바로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이 남행해서 마이산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이산은 신라 때 서다산(서쪽에 많은 산들 중에 가장 아름답게 솟은산!, 솟았다, 섯다) 그리고 고려 시대에는 용출산(용이 하늘로 솟아 오를 듯한 기상) 이라 불렸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는 속금산(금을 묶어 놓은 금덩어리 산! ..,
땅속에서 솟아난 산 )이라고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이중에서 서다산과 용출산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서다를 이두식 표기로 볼 때 그 뜻은 '섯다'이고 그 한문식 표현은 용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몽금척 전설과 마이산의 별칭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장수로 있을 때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척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금척으로 장차 삼한의 강토를 헤아려 보라. "
그 후 이성계는 고려 우왕 6년(1380)전라도 남원 운봉에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가 침입하자 한걸음에 달려가 무찌르고는 개선하는 길에 용출산을 보고 그 모습이 꿈 속에서
받은 금척을 묶어 놓은 듯하다 해서 '속금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30일 동안 마이산에서 기도하며 건국의 대의를 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자면 이성계의 이씨가 목성에 해당되는 금과는 상극이므로 세상의 '금' 기운을 묶어 주라는 뜻에서 속금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전설은 이성계가 왕이 된 후 금강산에 금자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매우 꺼려하여 그 이름을 바꾸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여하튼 태조는 자신이 속금산이라고 명명한 이 산을 두고 이렇게 시를 지었다.

동으로 달리던 천마 이미 지쳤는가
갈 길은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연인(내시)이 몸통만 가져가고 두귀는 남겼는가
두 봉우리 이루고 하늘로 솟아 있네.

태종은 1413년 10월 12일 이곳에 와서 부왕이 남긴 시를 보고는 마이산이라 개명했다. 그리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일을 기념하여 수마이봉 아래에
있는 은수사에서는 매년 10월 11일 오후 마이산 제단에서 국태민안과 시화연풍을 기원하는 마이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이산 제단은 1990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해서 진안군이 복원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건 앞의 전설은 조선의 창업을 기리는 노래로 궁중의 연희악이나 종묘 제악에 사용되었던 '몽금척요'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데, 진안군은 매년 10월 12일을 진안 군민의 날로 정해서 몽금척무를 공연하고 부부 시인 담락당과 삼의당을 기리는 백일장 및 사생 대회, 좌도 농악 공연, 향토 미술인 초대전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치르고 있다.

이 몽금척요는 태조 2년 그러니까 1393년 7월에 관습도감이었던 정도전 이 가사를 지은 것이다. 태조가 개국한 후 관제의 개혁, 법령의 제정 그리고 신도의 건설 등 할 일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무악에 관한 한 대개 이전 왕조 즉 고려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새 임금의 장수를 빈다거나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가사를 짓고 음악을 붙여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정재를 창작했는데, 몽금척요는 그 정재 중에서 최초의 것이라고 전해온다. 몽금척요의 가사중에서 마이산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산의 사면은 모두 돌로 우뚝 솟아 돛대와 같은데, 그 아름다움이 그지없이 좋도다. "

몽금척요라는 궁중정재는 궁중 무용 제1호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되었고, 국운이 기울게 된 구한말 새로운 훈장제도를 만들 때 금척대훈장은 최고의 훈장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랜 세월동안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온 마이산은 마치 저 금강산처럼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날 짙은 안개속에 세상 만물이 묻힐 때 뚜렷하게 떠오르는 쌍봉이
마치 바람을 안고 있는 돛폭같다고 해서 돛대봉이라 하고, 여름에는 굽이치며 뻗어나가는 푸른 산맥이 용의 몸뚱이라고 한다면 쌍봉은 그 뿔과 같다고 해서 용각봉이라고 부른다. 또 가을에는 산이 살찐 말로 붉고 누른빛을 띨 때 쌍봉은 그 귀와 같다고 해서 제 이름대로 마이산이라 불리고, 겨울에는 백설로 덮인 쌍봉이 붓과 같다하여 문필봉 이라고도 한다.

마이산의 수마이봉은 당당하게 곧추 서있는 것이 마치 남근을 조각해 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없지만, 암마이봉엔 등산로가 개설되어있다.
휴게소의 오른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약20분 가량 그리고 금당사에서 탑사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 가면 40분 정도면 충분히 정상에 설 수 있다.
승천하지 못하고 산이 되어버린 탓이 아내 산신이었다고 하는 전설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암마이봉은 그 업보를 치르느라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밝힘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